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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치신문은 이번호부터 세계적인 영웅 제일교포 역도산의 수제자 고흥군민의 영웅이자 대한민국의 영웅인 박치기왕 김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을 연재한다. 넘쳐나는 기사들로 도저히 할애 할수 없는 지면을 더군다나 안수원작가의 장편소설 배달의 연재를 중단하면서까지 송하훈 작가의 청을 수락하기로 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제1장 일본행 여수 항구는 항상 북적거렸다. 출항하는 배와 입항하는 배가 늘 교차했으며 쪽빛 다도해의 비린내를 가득 싣고 온 어선들이 나타날 때마다 갈매기들의 날갯짓은 파닥파닥 더욱 요란스러웠다. 뭐라도 먹을 것이 없을까 싶어 뱃바닥을 기웃거리는 놈, 배의 꽁무니를 열심히 따라다니는 놈, 이 배 저 배 훔쳐보듯 날아다니는 놈 등 각양각색이었다.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한시 반시도 은빛 날갯짓을 멈추지 않은 놈들에게 무심코 눈길을 주고 있을 때, 항구 저편 오동도(梧桐島)를 휘돌아 무역선 한 척이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얼른 봐도 일반 어선과는 판이하게 다른 일본 시모노세키항에서 20여 시간동안 현해탄을 건너 여수항에 마악 도착하는 거대한 목선의 무역선이었다. 이윽고 무역선이 현해탄의 거친 파도를 이기고 온 탓인지 가쁜 숨을 내쉬며 닻을 내렸을 때, 김일(金一)은 정박해 있는 통통배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 배를 향해 걸어 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호주머니에서 역도산(力道山))의 사진을 꺼내들고 훔쳐보듯 들여다보았는데 틀림없이 그 무역선의 선장은 큰 선물을 안겨줄 게 분명했으므로 절로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선장 역시 자신이 장담했던 일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으므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제 집 드나들 듯 오가며 수산물을 교역하는 무역선의 선장이었는데, 김일을 만날 때마다 입에 침을 튀겨가며 역도산이란 이름을 들먹이곤 했다. 그리고 그 배의 갑판장을 시켜 역도산이 누구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김일 역시 고흥 거금도에서 여수까지 오가며 수산물을 부둣가에서 팔았으므로 두어 차례 그 선장을 만날 수 있었고, 만날 때마다 역도산의 이름을 귀가 젖도록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 오동도에서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섬의 생김새가 오동잎을 닮았을 뿐 아니라, 오동잎만 먹고 산다는 봉황새가 날아들었다는 전설이 있었던 바로 그 오동도. 그러나 지금은 겨울부터 춘삼월까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곤 하는 그 오동도의 만개한 동백꽃이 모감모감 떨어지던 때였다. 김일은 여수항에 올 때마다 오동도를 반드시 들리곤 했다. 그 곳에서 좌판 술을 한 잔 걸치는 것이 하나의 낭만이었다. 바닷가 낮은 길 위에 띄엄띄엄 좌판을 만들어놓고 해삼, 멍게, 산낙지 등을 파는 장사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김일은 거금도에서 가져온 돔, 장어, 감성어 등 수산물을 죄다 팔아넘겼으므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혓바닥에 쩍쩍 붙는 산낙지로 안주삼아 소주 한 병을 털고 있었다. “워따, 여수까지 갔다 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나” 여수항을 다녀온 날이면 어머니는 부엌일이나 빨래를 하다말고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김일의 손을 붙잡고 한없이 짠한 표정을 짓곤 했다. 몸은 약한 편이었지만 얼굴이 곱상했고 피부가 고운 어머니였다. 스물여덟 살이 되도록 장남으로서 농사짓고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 여수 부둣가 시장까지 가 팔았기 때문에 어머니로서는 고맙기도 했지만, 아들 고생하는 모습에 늘 안타까워했다. 농사일도 고기 잡는 것보다 더 어려웠으면 어려웠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소를 데리고 쟁기질을 하고 써레질을 하고 품앗이로 모를 심고 벼가 차랑차랑 결실을 맺었을 때 낫으로 벤 후 지게로 나르는 일 등이 뼈 빠지게 힘들었다. 겨울에도 쉬는 날이 없었던 것은 푸나무, 갈퀴나무, 등걸나무 등을 해야만 삼시세끼 밥을 짓고 온돌방을 뜨뜻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을 친구들과는 달리 김일에게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체가 유별났다. 정 자, 수 자를 쓴 아버지는 육천장신이었고 힘깨나 쓰는 사람이었다. 김일은 그런 아버지와 기골이 장대해서 조선시대 장수(將帥)로 활약했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뛰어난 절인지력(絶人之力)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김일은 명절 때면 으레 벌어지는 씨름대회에 참가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소를 타오곤 했다. 소를 앞세우고 마을에 나타나면 아버지 어머니는 맨발로 뛰어나오다시피 하며 몹시 반겼고, 마을 농악대가 징과 꽹과리를 치며 온 마을을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환영 김일 씨름 우승’이라는 붓글씨가 여기저기 나붙어있곤 했다. “네가 또 대회에 나가서 소를 타왔구나. 장하다, 내 아들……” “아이구, 믄 일이라냐! 우리 아들 큰일을 해냈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 좋아하셨고, 마을 사람들은 집에까지 찾아와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우리 거금도에 장사가 하나 생겼당께!” “국민학교 댕길 때부텀 어른도 이길 만큼 힘이 세등마는 그런 장사 아들이 효도도 젤이구마!” 그럴 때면 아버지는 즉시 마을사람들을 모아 귀한 돼지고기며 막걸리를 내놓고 잔치를 벌이곤 했다. 본디 아버지는 곤비하고 궁색한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 도와주려는 마음씀씀이가 컸다. 마을 사람들은 난망한 일이 생길 때마다 찾아오곤 했고, 아버지는 몸이 불편했을 때도 자기 일이나 되는 양 앞장을 서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무심코 당골레에게 점을 봤는데 아버지가 아직 저승길에 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극락왕생을 못했을망정 구천에서 떠돌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란 어머니가 물었다. “그러코롬 남 도와주기 좋아했던 양반이 믄 일이다요?” “저승길 가다보니 어떻게나 담 무너진 집이 많아 그 담 본래대로 고쳐주느라 못가고 있다요.” “남의 사정 봐주다가 애 배고 남의 초상에 효자난다는 말이 있제마는 살아생전에도 남 일에 앞장서등마는 저승가서도 그런갑소이.” “얼마나 좋은 양반이었으면 저승길에서도 그렇게 좋은 일을 하것소.” 당골레가 방금 전에 나주반 위에 쫙 뿌렸던 쌀을 두 손으로 모으며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씨름대회 기쁨도 잠시, 김일은 다시 가난과 싸우기 위해 바닷가로 논밭으로 다니며 일을 해야만 했다.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였지만 결혼해서 분가를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애옥살림 가난은 아니었다 해도 여름철 팅팅 불어터진 꽁보리밥과 시어빠진 김치 한가닥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가난이 그의 발목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다람쥐 첩 얻은 꼴이어서 그 가난을 벗어나고자 여수까지 다니며 생선을 팔았던 김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낮술 한 잔 걸치고 나자 술기운이 약간 오른 채로 통통배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막 무릎을 세웠을 때였다. “장사님!” 누군가가 등 가까이에서 갑자기 김일을 부르는 것이어서 고개를 휙 돌려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나이로 따진다면 열 살은 더 먹게 보이는 40대 초반의 사내였다. 그는 비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갑게 대하는 표정도 아닌 애매한 웃음기를 머금고 김일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장사(壯士)라고 부르다니? 게다가 나이가 훨씬 어린 젊은 사람에게 존경의 친절의 의미를 담은 ‘님’자까지 붙여 부르다니? 김일의 몸집이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예사롭지 않은 점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장사라고 부르는 것은 부둣가 건달들이 짐짓 상대방을 놀리려는 수작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니면 김일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님’자란 높임말까지 보태서 부르는 것에는 아예 우롱을 작정하고 하겠다는 수작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적어도 ‘님’자 호칭을 받으려면 학교 선생님이거나 면장 ‧ 군수, 정도는 되어야 옳을 터였다. 한갓 부둣가 시장에 생선을 파는 장사꾼에 불과한 사람에게 가당치 않는 호칭이었다. 하긴 씨름대회에서 우승을 할 때마다 장사란 말을 들어온 김일이었지만 길바닥에서 낯선 사내에게 장사라는 호칭을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얼른 보아서는 반건달도 온건달도 아닌 성 싶었지만 일단 장사님이란 호칭에 일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사내도 김일처럼 다른 좌판에서 한 잔 술을 걸쳤는지 이미 얼굴은 홍조를 머금고 있었고, 마지막 안주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그래도 오동도라면 장사님한테는 추억이 있는 곳 아닌감?” 사내는 씹던 안주를 마저 삼키고 나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말 속에는 이미 김일을 잘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의 말대로 오동도라면 김일에게 씨름대회의 추억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어서 마음속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고흥 거금도로 돌아갈 때가 되었으므로 서서히 통통배에 올라야만 했는데, 뜻밖에도 사내가 강하게 한 마디를 던져왔다. “이제 거금도로 돌아가실려나 보군. 고기를 다 팔았으니 어서 가긴 가야겠지.” 사내의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번득이고 있었는데 얼굴이 무척 까칠했다. 먼지를 풀풀 날리며 황톳길을 달리는 버스처럼 억센 면도 엿보였다. “사내라면 당연히 그렇게 일을 하며 살아야겠지. 우리 네 삶이라는 게 먹는 것보담 더 큰 일이 어딨겠어? 바둑 두고 장기 두는 거 그거라도 두는 것이 안 두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지. 이 말이 무슨 소린고 하니 세월아 네월아 하며 뻔뻔 노는 놈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렇게 자빠져 놀려면 바둑 두고 장기 두라고 한 말이지. 그런데 젊은 사람이 부모형제를 먹여 살리느라 지악스럽게 살고 있으니 얼마나 보기 좋은 일이 아닌감?” 사내는 아예 친동생 정도로 생각했는지 순 반말지거리로 말했지만 그렇다고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으나 통통배 선장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바람에 계속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김일이 약간 고개를 숙여 보이고 떠나려하자 사내가 재빠르게 그러나 한 마디씩 잘라서 붙잡았다. “장사님은 혹 역,도,산을 아시는가?” 역도산이라니? 역도산 그가 누구란 말인가? 분명 이름인 것 같은데 김씨니 이씨니 박씨니 하는 우리나라 사람의 성씨는 아니지 않는가? 갑자기 타국 사람의 이름을 들이대며 알고 있느냐고 묻는 그의 수작이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이 누군데 아냐고 물어보십니까?” “천하의 역도산을 모르다니, 참으로 한심하군.” 이번에는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꾸중하는 투로 면박까지 주었다. 반말을 해대는 것도 참기 어려운 판에.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다짜고짜 그 양반을 들먹이시오?” 그러나 순간, 김일은 문득 안개가 갑자기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다람쥐 체 바퀴 도는 생활을 끝내고 뭔가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것 같은……. “나는 사람 볼 줄 아는 사람이라구. 보아하니 젊은이는 씨름을 잘 하는 사람 같은 데 내 말이 맞지?” “씨름을 잘 하는 것은 어떻게 알고…….” 그의 눈빛은 매우 강렬했고 어쩌면 차가운 느낌마저 주었다. “그래서 역도산을 아느냐고 물었던 거라구.” 씨름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대중화된 운동경기였다. 그래서 씨름꾼을 고려시대에는 용사(勇士)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조선시대에는 역사(力士)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그만큼 대단한 존칭어를 사용한 것은 전쟁터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용장이 될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씨름은 맞붙을 두 사람이 마주 꿇어앉은 후 샅바를 매고 서로 어깨를 맞댄다. 오른손으로 상대의 허리샅바를 먼저 잡은 뒤 왼손으로는 상대의 허벅다리에 건 샅바를 잡고 나서 동시에 두 사람이 허리를 펴고 일어나 시합을 하는 경기였다. 씨름은 여러 가지 기술이 있었다. 손기술 ‧ 다리기술 ‧ 허리기술 ‧ 혼합기술이 있었는데, 김일은 육중한 체격과 여러 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어떤 상대가 나타나도 자신만만했고 결국 우승으로 이어졌다. 씨름에서 우승하는 게 낙이었고 재미였지만 시합이 끝나고 나면 왠지 허전해지는 마음은 감출 길이 없었다. 여전히 부모님과 마을사람들은 갈채를 보내왔지만 씨름판이 김일의 인생 전부는 될 수 없는 법이어서 더욱 마음은 공허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었기에 그렇게 세월을 보낼 수밖에. 그래서 거금도에서 잡아온 물고기를 여수항에서 죄 팔아넘기고 이제 오동도에서 동백숲을 바라보며 소주 한 잔 걸친 후 슬슬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에 뜻밖에 그 사내가 나타난 것이었다. “난 젊은이가 오동도에서 씨름대회가 열렸을 때 우승한 걸 지켜보았지. 대단한 실력이더군.” “그럼, 절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요?” “그렇지. 씨름대회를 지켜보았으니까.” 씨름대회는 비록 오동도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대회를 휩쓸었던 김일이었다. 그런데 오동도 씨름대회에서 김일을 지켜보았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다면 그는 일찍이 김일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질 않는가. “나도 젊었을 땐 씨름께나 했었지. 그러나 한 번도 우승을 한 적이 없었어. 씨름이라는 게 어디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 경기 아닌가? 내겐 그 기술이 란 게 부족했던 것이지.” “씨름을 했었기에 저에 대해 관심을 두셨군요.” 김일은 가까운 곳에서 날개짓을 하는 갈매기를 무심코 바라보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사내 역시 어깨며 등판의 선이 굵었다. “그때, 그러니까 오동도 씨름대회 때 김기수 선수도 보았지. 지금은 유명한 권투선수가 되었지만 당시 젊은이가 김기수 선수에게 씨름을 가르쳐 주는 것까지 지켜볼 수 있었어.” “아니, 어떻게 김기수 선수까지?” 김일은 떡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오동도에서 씨름대회를 하고 있을 때 유독 한 젊은이가 눈에 띠었는데, 그는 선수 출전은 하지 않았지만 환호성을 지르는 관중들 틈에서 넋을 잃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작은 키였지만 근기가 느껴지는 친구였다. 시합이 끝나고 그가 김일에게 다가왔다. “저는 함경도 북청에서 피난을 온 김기수라고 합니다. 북청이 어디냐 하면 추사 김정희 선생이 유배를 온 곳입니다.” 그는 애써 추사 김정희를 들먹이며 함경도 북청 출신임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4대 명필 중 한 분으로 손꼽히는 추사 김정희는 한국의 서성(書聖)이라 할 만한 분이었다. 추사가 북청 유배를 간 것은 1851년의 일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철원과 철령을 거쳐 함흥으로 들어간 뒤 천신만고 끝에 간 곳이 북청이었는데, 초라하고 볼품없는 굴피집에서 비바람 막으며 지내야만 했다. 1년간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던 추사로서는 기가 막힐 곤욕의 세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기수는 그런 추사의 유배지였던 북청에서 피난을 온 사람이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김일은 짐짓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조금 전에 씨름대회를 지켜보았는데 정말 솜씨가 훌륭하십니다. 제게 한 수 가르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작정 통사정하는 그의 태도가 밉지는 않아서였던지 김일은 씨름판으로 데리고 가 몇 수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그는 배우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승부욕이 강했고 저돌적이었다. 하긴 운동경기에 임할 때는 승부근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악착같이 덤비는 당돌함에 김일은 마음속으로 보통 악바리가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간 씨름판에서 황소를 타고도 남을 선수가 될 것으로 직감했다. 그렇게 씨름 기술을 몇 수 배우고 나서 그는 김일을 친형처럼 따랐고 여수에 갈 때마다 만나곤 했던 후배 김기수를 사내는 들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만난 것도 어쩌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큰 행운이 될 수 있을 것이야. 나를 따라와 보지 않겠나? 나를 따라 오면 무슨 고대광실 요정집에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창녀들이 득실거리는 사창가를 가는 것은 더욱 아니지. 나를 따라오면 역도산을 보는 것만큼이나 역도산 얘기를 한 번 들으라는 거지. 역도산을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잠자코 따라오게나.” “오늘은 그냥 가봐야겠습니다. 다음에 여수에 올 때 역도산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 그러나 다음번엔 꼭 나를 찾아오라구.” <저작권자 ⓒ 한국자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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